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만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안녕하세요. 바다라임입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봤습니다. 작년에 각종 영화제에서 선보인 '패스트 라이브즈'입니다. 얼른 보고 싶었는데 이번 주가 되어서야 시간이 났네요.
영화는 해성(유태오 역)과 나영(그레타 리 역)의 어린 시절을 보여줍니다. 시작부터 나영이 울고 있는데, 이유는 늘 1등을 하다가 이번에 해성이 1등을 하고 그가 2등을 한 탓입니다. 해성은 그런 나영의 옆을 지키며 '나는 맨날 2등 하다가 딱 한 번 1등 한 건데도 그렇게 분하냐'는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린 나영의 성격이 어떤지 바로 알 수 있죠.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사진작가인 어머니는 나영과 그의 동생을 데리고 미국 이민을 준비합니다.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좋은 추억도 쌓을 겸 데이트를 시켜주겠다고 합니다. 해성과 나영이 우비를 입은 채 설치미술 앞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던 어머님들은 짧은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해성의 어머님이 좋은 직업을 두고 어떻게 미국으로 떠날 생각을 하시냐고. 나영의 어머님이 대답합니다. 버리고 가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죠.
저는 이 대사가 '패스트 라이브즈'를 관통하는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전생(前生)
영화 제목이기도 한 past life는 전생을 뜻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영화 제목은 전생들이겠죠? 전생은 윤회를 기본으로 한 불교의 삼생 중 하나로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입니다. 관계가 정말 최악으로 안 좋은 사람에게도,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죠. 전생에 우리가 어떤 관계였길래 이렇게 만났을까- 라고요.
영화 속 해성과 나영은 12살 때 만나서 24살 땐 기술의 발달로 스카이프와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하고 36살이 되어서야 얼굴을 봅니다. 왜 하필 12년일까요? 불교에선 12연기(緣起)로 윤회와 인연을 말합니다. 연기(緣起)는 모든 현상이 생기고 또 소멸하는 법칙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불교용어인데,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입니다. 이 12연기가 12년을 뜻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12연기에선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단계를 거쳐 중생들이 윤회한다고 하죠. 어쩌면 윤회에 다다르며 인연이 쌓이는 각 12년의 시간을 표현한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배우가 이 역할이라서 더 좋은 영화
나영이자 노라를 연기한 그레타 리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민자 역할을 정말 잘 소화해냈습니다. 그때 그 시간에 묶인 것 같은 한국어 단어 선택과 억양, 인터넷을 통해 배운 티가 나는 몇몇 단어들을 사용할 때 드러나는 미국인 같은 표정 같은 거요. 그런 세세한 부분이 문나영와 노라 문을 섬세하게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아서를 연기한 존 마가로는 실제로 부인이 한국계 이민자라고 합니다. 한국어를 배우려 애쓰는 모습이 어쩌면 현실 속의 그를 반영한 연기가 아니었을까요? 해성이가 아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게 정말 진심이 닿았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어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는 잘 알다시피 독일에서 자랐음에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공대생과 직장인 역할을 잘 소화한 거 같습니다. 적당히 살 붙은 몸에 평소 유태오라면 입지 않았을 거 같은 핏이 애매한 바지, 셔츠. 확실한 답을 내리려 하는 면모라든가 말투까지도요. 걘 코리안-코리안이라는 노라의 말이 딱 맞았어요.
세월의 흐름과 그에 따른 배우들의 연기톤이 느껴져서 정말 저런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것만 같은 그런 영화였습니다. 꼭 연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그렇기에 제가 영화라는 매체에 바라는 게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더 좋았어요.
아래는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셀린 송 감독님과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저도 이 글을 올려두고 보려구요. 좋은 영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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