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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커피 없이는 못 살아

by 바다라임 2024. 1. 24.

 

가족들에게 커피 타주던 꼬맹이가 뜨아메 없인 못 사는 낡은이가 될 줄이야

 

 

 

  어렸을 때 가족들은 종종 내게 작은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달달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을 때면 인스턴트 커피를 타다 달라는 게 심부름의 내용이다. 한 잔씩 타다 드리고 나면 내 손엔 500원의 용돈이 주어졌다. 그 어린 날에 500원은 정말 큰 돈이었기에 난 가끔 ‘커피 마시고 싶지 않아?’라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아마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굳이 마실 필요 없는 커피 심부름을 시키신 적도 있을 것이다.

 

  심부름을 하다 보면 한 번씩 이 커피는 무슨 맛일까 궁금해졌다. 어린 아이는 커피 마시는 거 아니라던 어른들의 말 때문에 보는 사람이 없어도 몰래 한 모금 마셔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티스푼으로 따뜻한 커피를 아주 조금 마셔봤을 땐 그게 어찌나 달고 맛있게 느껴졌는지. 커피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달달한 인스턴트 커피에 혀끝만 대보던 어린 시절은 금방 지나갔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그때부터 다른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바로 아메리카노였다. 인스턴트 커피에서 설탕과 프림을 뺀 거 아메리카노라고 불러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땐 잠을 깰 목적으로 커피를 버릇처럼 마셨다. 맛도 향도 모르고 아침에 한 잔, 점심을 먹은 뒤에 식곤증이 올까봐 무서워서 한 잔, 야간 자율학습을 하기 전에 한 잔. 그땐 내 주위에 다들 그렇게 마시고 있으니 그게 깊은 잠을 방해할 수 있단 생각조차 못했다. 잠을 자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으로 훈장을 받는 대한의 고등학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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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엔 집에 커피 머신을 한 대 들였다. 필립스에서 파는 에스프레소 머신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괜찮다는 원두도 사서 내려보고, 추출량과 시간도 따져보고. 그렇게 애써 내린 커피가 맛있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글쎄요, 이다. 거기에 어깨의 으쓱거림도 한 스푼 더해줘 한다. 후각과 미각이 예민하고 커피 향과 맛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미세한 차이를 잘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탄맛이 나느냐, 많이 신 맛이 나느냐만 따지는 사람이었다. 아주 진지한 자세로 커피 즐기기에 임할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성비 좋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기―가 아니라 모닝 카페인 할당량 채우기의 삶을 살아가던 내게 하나의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많은 이들이 이용했고 지금도 이용 중인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 머신이었다. 원하는 추출량을 선택하고 수통을 채우기만 하면 된다니. 게다가 캡슐 커피 머신을 만든 네스프레소는 물론, 온갖 커피 브랜드에서 캡슐이 출시되니 그걸 사다 끼우기만 하면 된다니. 슬슬 원두를 사다가 갈아서 샷을 내리고 치우는 과정에서 귀찮음을 느껴가던 내게 빛과 소금, 강 같은 소식이었다. 아메리카노만 마시니 좋은 기계도 필요 없고 그저 기본형인 이니시아를 구매한 뒤에 기계 값을 한 달 안에 뽑아냈을 정도로 많이 쓴 것 같다.

 

  몇 년이나 이 기계를 썼을까. 심지어 청소마저도 캡슐을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고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 이 편한 기계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생활 가전들은 고장나지 않는 이상 바꾸는 일이 없고, 심지어 고장난다 한들 당연히 A/S를 받아 수리해서 쓰는데 커피와 관련된 용품은 왜 그게 쉽지 않은 건지. 이번엔 고민의 시간도 길지 않았다. 과거의 향수를 찾기라도 하듯 다시 필립스로 돌아갔다. 물론 기계는 전자동 커피 머신으로 바뀌었고.

 

  전자동 커피 머신은 몇 가지 세팅을 한 이후로 더 이상 손 댈 것도 없어서 얼마나 편한지―라며 문장을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녀석은 이 녀석대로 손이 많이 갔다. 내부를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더럽고 험한 꼴을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커피 머신에 만족하는 중이다. 지금은.

청소하는 것도 캡슐 커피 머신보다 귀찮고, 에스프레소 머신보다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데 왜일까. 아무래도 역시 아직 질리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 아마 이 기계가 지겨워지면 웬 핸드드립을 해보겠다고 나설지 누가 알겠나.

 

  내게 커피와 커피를 내리는 행위는 딱 이 정도인 것 같다. 커피를 마시는 건 몸이 카페인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데다 아직 받아주기 때문이고, 그걸 마시는 건 버릇에서 비롯된 관성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땐 꼭 커피를 넣는다. 하루에 한두 잔은 꼭 마시고 안 마시면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든다. 좋은 풍광을 볼 땐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이걸 봤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도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좋아하는 것’항목에 커피를 넣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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