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타임 안에 하고 싶은 말은 반의 반만 담아도 되니까 좋잖아요
한때는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일이 참 흔했다. 영화값이 지금보다 훨씬 쌌을 때의 이야기다. 두 시간 정도를 여유롭게 보내기 위해서 15000원을 내 취향에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를 영화에 쓰는 것보단 커피나 차, 디저트에 쓰는 게 훨씬 낫다고 여겨지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난 버릇처럼 극장으로 향한다. 영화를 보는 건 내 얼마 안 되는 취미 생활 중 하나니까.
영화 보는 게 취미가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화 보는 게 일상과도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 온 경우가 많던데 나는 아니었다. 난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막판에 보러 가거나, 명절에 TV에서 해주는 명화극장을 보고 마는 쪽이었다. 그런 내가 어쩌다 영화 보는 걸 취미로 갖게 됐을까.
삶을 그래프로 그렸을 때 굴곡 하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도 분명 저만의 굴곡이 있을 터다. 나 역시 그랬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불확실한 미래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덮치는 우울한 망상들 때문에 노상 불안해했다. 그게 내 낯에도 드러나는 탓에 가족들에게도 큰 걱정을 끼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곧장 집에 들어가는 것도 부담이 되더라. 이런 거무죽죽한 낯빛을 하고서 집에 가면 가족들도 걱정할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향한 게 극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티켓 가격이 크게 비싸지 않았고, 이래저래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도 많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카페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왜 극장일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감각들이 자유로워지는 게 싫었다. 눈은 내가 자의로 멈출 수 없는 영상을 보고, 귀로 듣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하는 극장이 편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두 번. 사람도 상대적으로 적은 화요일에서 목요일 사이. 내겐 영화를 정말 ‘보기만 하는’ 취미가 생겼다.
왜 보기만 하는 취미였냐면 당연하게도 머리에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선택한 취미 아닌 취미였으니 극장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들 영화가 내 머릿속에 제대로 남을 수 있었겠나. 정말 표현 그대로 생각 없이 보고만 나오니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몇 번 깊은 고민을 하고, 분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씬도 그러려니, 하고 나왔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내용조차도 떠오르지 않더라.
시간이 지나가며 내 삶의 그래프도 슬슬 상승곡선을 탈 때였다. 영화관의 멤버십 등급은 올라갔는데 여전히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남은 것도 없는 게 아쉬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정말 여유가 좀 생기긴 했나 보다 싶기도 했고. 그때부터 내게 영화는 시간만 보내기 위해서 버릇처럼 보러 가는 취미가 아니라 진짜 즐기기 위한 취미 생활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처음엔 영화의 평점을 남기는 유명 어플을 이용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들의 별점을 남기는데 픽픽 웃음이 터졌다. 사람 머리란 게 참으로 신기하게도, 어렸을 때 봤던 영화들 중에선 세세하진 않아도 영화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물론 어떤 장면이 좋았고 웃겼는지도 다 생각이 났다. 반면에 내가 짧은 방황을 하던 시기에 봤던 영화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억나는 게 없더라. 그때 이렇게 어플에 기록만 할 게 아니라, 영화 보는 방식 자체를 좀 바꿔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기억에 남는 장면을 기억하려 애썼고, 영화가 끝난 뒤엔 그 기억을 되감아보며 영화 분석 글을 찾아보았다. 그 장면이 어떤 영화를 오마주 했다든가, 가볍게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가 제대로 기억이 남았다. 물론 모든 영화가 이런 메시지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으니 그저 즐기기만 해도 괜찮고.
어쨌든 난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로 했다. 작은 노트와 소리가 잘 나지 않는 펜을 들고 영화를 보면서 낙서하듯 키워드를 적었다. 이때 옆 관객들에게 방해되지 않게끔 아이템을 고르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는 건 작은 후일담. 하여튼 낙서하듯 적은 단어들의 나열을 보고 있으니 영화 내용이 더 잘 기억에 남더라. 그것을 바탕으로 블로그에 후기를 하나씩 남기고 있다. 여타 평론가들처럼 대단히 심도 있는 후기를 남기는 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보단 나도 내 나름의 기록을 가질 수 있음에 만족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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