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몇 달만에 머리를 다듬으러 단골 미용실에 갔다.
솜씨가 좋고 가격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 동네 미용실은 누가 봐도 세련된 '헤어샵'과는 거리가 멀다.
거짓말 한 톨 보태지 않고, 단골로 다닌 지난 몇 년동안 내 또래의 손님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길 가는 이유는 단지 가격 때문이 아니다.
대학 입학을 며칠 앞두고 펌을 하러 미용실에 갔을 때였다. 난 머리카락이 얇고 힘이 없어서 축축 처지는 편이다.
아마 미용사들도 만져보면서 바로 알았을 것이다.
특히나 지금과는 달리 그땐 고등학생 땐 기껏해봐야 매직 몇 번 밖에 안 해봤으니 크게 상할 리도 없었고.
미용사들은 내게 세팅펌을 권했고, 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중 제법 큰 돈을 지불했다. 12만원이었나, 14만원이었나.
하지만 머리는 채 2주일도 가지 못했다.
그땐 내가 관리를 잘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뭘 어떻게 말리고, 뭘 바르고, 어떻게 해줘야 하고.
몰라서 안 했으니 비싼 머리를 해도 다 풀려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열심히 바르고, 꼬아가며 말리고, 어쩌고저쩌고. 결과는 2주로 동일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펌 자체를 포기했다. 그냥 살련다! 하고 자연인처럼 길면 자르고 길면 자르고.
하루는 할머니가 내가 가는 미용실에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
머리를 하고 싶은데 퇴원하신지 얼마 안 됐을 때라 혼자 가기 엄두가 안 난다고.
넌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된다기에 따라갔었다. 너무 민망하면 좀 자르고 오기만 해도 되니까.
미용실은 그냥 평범한 동네미용실.
보통 받는 가격에서 노인들은 만 원을 깎아주는 인심 좋은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손님이 많아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리를 빤히 보시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내가 세팅펌도 해보고 그거 안 되니까 별별 펌을 다 해봤는데 오래 못 가요! 했더니...
그런 걸 하니까 오래 못 가지, 라고 하시더라. 예? 예에?
내 머리는 비싼 펌을 할 것도 없이 속된 말로 할머니들 파마약에다가 제일 얇은 롯드로 한 번 세게 펌을 넣어주고!
그 다음부턴 굵은 걸로 넣으면 된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밑져야 본전. 할머니 머리를 하러 가서 졸지에 내 머리부터 하게 됐다. 길이가 기니까 할머니가 뒤로 밀렸는데 어찌나 흥미롭게 구경하시던지. 과연 내 손녀의 머리가 무슨 꼴이 될지 궁금해하는 눈치셨다.
결과는 원장쌤의 말이 맞았다.
단돈 4만원짜리 펌이 나에게 가장 잘 어울렸고, 아무 에센스나 발라줘도 2달은 펌이 유지됐다.
그 뒤부턴 오히려 자연스러운 컬이 남아서 보기 싫은 수준도 아니었고.
몇 달 뒤에 갔을 땐 훨씬 굵은 롯드로 말아서 빠!글!빠!글! 펌은 아니어지만 이 역시 오래갔다. 가격은 똑같이 4만원.
어이가 없더라. 그간 '헤어샵'에 가져다 바친 돈이면 여기서 늙어죽을 때까지 하고도 남았겠단 생각이 들더라.
여긴 그런 곳이었다. 비싼 서비스 하나 팔아먹고 끝인 대형 헤어샵이 아니라 동네 단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그런 작은 가게. 그래서 차라리 더 솔직할 수 있고 안 되는 건 안 된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가게.
오늘도 그렇게 펌을 위해 미용실에 갔다. 여전히 손님은 많지만 원장쌤은 가게 유지가 쉽지 않을 거 같다며 걱정이 많으셨다. 아주머니들은 기술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손님이 이렇게 많은 가게 찾기 힘들다며 위로했지만.
원장쌤이 그러셨다. 기술이 있으면 굶어죽지 않는다지만, 기술이 있어서 평생 그걸로 벌어먹고 살아보니 다른 일은 배우지도 못했단 거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이것만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졌을 땐 정말 손가락을 빨게 된다고.
그럴 일이야 없는 게 최고고, 정말 최악의 상황일 경우를 상정하는 거겠지만 요즘은 고민이 많으신 듯했다.
모두 너무 힘들고, 그야말로 돈이 궁해서 자잘하게 머리를 다듬으러 오거나 뿌리 염색 같은 걸 하러 오는 손님들이 눈에 띄게 줄었단다.
벌써 이 정도인데, 여기서 바로 경기가 좋아지면 괜찮겠지만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이 많으신가 보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속사정이었다. 사방에서, 특히 자영업자들이 내는 곡소리가 코로나 시기보다 커졌다. 그만큼 그들의 시름도 깊어졌으리라.
모두 많이 힘든 시기를, 너무도 오래 지나오고 있다. 죽어라 달리는데 터널 끝의 빛무리는 마치 우리가 기어가고 있는 것처럼 아주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다.
이번 겨울은 얼마나 추울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모두 겨울이 그리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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